1871년 영국 사진가 펠리체 베아토가 신미양요 당시 격전지였던 광성보에서 찍은 조선군 시신사진은 어떤 카메라로 찍었을까?
시신촬영은 너무 안타까운 장면이네요ㅠ
오늘의 주제는 당시 엄청나게 무거운 카메라를 설치해야 했을텐데 이것은 장노출을 해야 하는 이유이기 때문일거에요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영국 출신의 사진가 펠리체 베아토(Felice Beato) 가 촬영한 광성보에서의 조선군 시신 사진은 대형 포맷의 습판 콜로디온(Wet Plate Collodion) 방식 카메라로 촬영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 베아토가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카메라 및 촬영 방식
- 카메라 유형
- 대형 목재 필드 카메라(Field Camera)
- 벨로우즈(주름관) 구조를 가진 카메라
- 습판 콜로디온 방식 사용 (Wet Plate Collodion Process)
- 11x14인치 또는 그 이상의 대형 판형 유리 네거티브
- 렌즈
- 당시 사진가들이 선호했던 펫즈발 렌즈(Petzval Lens) 또는 래피드 렌즈(Rapid Rectilinear Lens)
- 조리개 값은 대체로 f/3.6~f/8 정도로 비교적 밝은 렌즈였으나, 셔터 속도가 느려 장시간 노출이 필요함.
- 필름 대신 유리 네거티브
- 당시에는 롤필름이 없었으며, 습판 콜로디온(Wet Plate Collodion) 방식으로 촬영됨.
- 유리판(Glass Plate)에 감광제를 바르고 현장에서 즉시 촬영 및 현상해야 했음.
- 노출 시간과 촬영 방식
- 노출 시간은 수 초에서 수십 초까지 필요했으며, 이는 정지된 시신 촬영에 적합했음.
- 삼각대(Tripod) 사용 필수.
📜 배경 설명
- 펠리체 베아토는 전쟁 사진의 선구자로 알려졌으며, 크림전쟁(1853~1856), 인도 세포이 항쟁(1857), 중국 2차 아편전쟁(1860) 등에서도 유사한 방식의 촬영을 진행한 바 있음.
- 당시 미국 해군이 조선을 침공했을 때, 베아토는 미 해군과 동행하며 조선군의 시신과 전투 현장을 기록하였음.
📌 결론
펠리체 베아토는 대형 목재 습판 카메라를 사용해 조선군 시신을 촬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1870년대 당시 가장 널리 사용되던 방식이었으며, 베아토 역시 중국과 일본에서 같은 방식으로 촬영한 사진을 남겼기 때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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